지난 주간 인생의 중요한 진로의 고민 앞에서 갈등하는 두 사람의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한 사람은 갈등하는 진로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다림을 믿고 현재의 자신을 좀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현재 자신의 꿈과 도전에 대해서 좀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한 기회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다른 한 사람은 갈등하는 가운데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인도하심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도전의 삶을 선택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포기하기 어렵고 저것도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을 하면서 원하는 길을 향해 도전하여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아브라함에게 선택을 요구하실 때에 우선 요구하는 것은 “포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전부처럼 여겼던 가족과 고향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가치로 여겼던 가족중심, 평안과 안정 중심의 삶에 대해서 먼저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됨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이 “포기”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 자매나 어머니와 아버지 자식을 떠날 것을 요청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설의 진리를 강조하십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역설의 진리를 실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정들었던 가족 고향과 부모를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떠났고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떠남으로 인생의 소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떠남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인간적으로는 매정해야 하고 세상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으면 관계적으로는 외로울 수 있고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복을 경험했습니다.
역설의 진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소명의 길을 위해서 먼저 “포기”를 강조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내가 의지하고자 했던 모든 세상의 것들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연결되었던 모든 세상의 것들을 떠나라는 것은 사형선고와 같다고 여깁니다.그래서 상당한 경우에는 급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융통성 있게 적당하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처신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세상의 합리성과 실용성에 이용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 안에서 나의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여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설의 원리는 먼저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내려놓고 포기한 경험이 없이 주님이 주시는 것들을 절대적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것을 얻으려면 이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역설의 진리는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지난 주간 치과에 가서 스켈링을 했습니다. 2년 전에 잇몸이 아파서 다녀온 이후에 모처럼 간 것입니다. 날마다 2-3번의 칫솔질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대로 건강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역시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충치도 생겼고, 치석도 생겼고, 잇몸도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의 잘못된 습관이 문제였습니다. 날마다 1번 이상 치실을 사용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또한 칫솔질을 하면서 이의 구석 구석을 깨끗하게 닦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6년 전에 한국을 떠나면서 우리 집 식구 5명은 치과에서 이를 점검하면서 큰 댓가를 지불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도 여러명의 식구대로 너무도 아까운 큰 돈을 치과에 투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문제는 습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나쁜 습관으로 결국 치아에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치아만 아니라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의 건강은 우리의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막상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어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기 까지는 문제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바람은 간절하지만 바른 습관으로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복되는 나쁜 습관은 몸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 건강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고통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은 요즘 몸에 암이 발생하여 고통스러운 치료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치료가 궁금해서 연락을 드렸더니 그분의 말씀은 “목사님 나는 내몸이 이렇게 약한 줄 몰랐습니다. 그냥 한방에 훅 하고 가고 마네요”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너무도 건강하던 몸인데 암치료를 받으면서 너무나도 무력한 육체의 모습을 경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을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살짝 땅에 떨어져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우리의 몸은 평소의 나쁜 습관 하나도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예외없이 깨어져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질그릇같은 우리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건강한 습관을 날마다 갖아야 합니다. 내 몸의 건강은 내가 뿌린 대로 거둡니다. 나쁜 습관을 뿌리면 질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을 뿌리면 건강으르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나쁜 습관들은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갖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습관이 좋은지 우리 스스로가 알고 지켜야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 스스로가 내 몸에 대해서는 의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연약한 육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입니다. 영혼도 거룩하게 세워져야 하지만 육체도 거룩하게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탈무드를 보면 저들의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정결의 습관들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가령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파문될 것이다”라고 엄하게 명령합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그들은 씻기, 기름바르기, 규칙적인 운동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혼의 건강과 아울러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바른 습관과 규칙들을 지켜가면서 건강한 몸으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2월 11일) 지난 2년 동안 기도하면서 고심하던 새로운 교회당 계약의 사인을 두 분의 안수집사님들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마쳤습니다. 새교회당은 롱아일랜드의 사요셋에 위치하고 있는 성공회 교회당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가서 보았던 곳인데 1960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넓은 주차장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본당과 더불어 식당과 교육관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사요셋은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플러싱에서 30분 이내의 시간상 거리의 지역입니다. 사요셋은 고속도로와 더불어 다양한 도로와 더불어 맨해튼을 연결하는 기차역이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도시입니다.
새교회당 계약을 하고 나서 건물 클로징까지 시간은 대략 2개월-3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계산상으로는 5월까지는 사요셋 교회당 건물을 클로징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현재 우리 교회당도 클로징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적어도 6월 이내에는 새로운 교회당으로 무빙되어질 예상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새교회당으로 무빙을 전제하고 우리가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은 새교회당 리노베이션 준비입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다함께 사요셋 교회당을 함께 자세하게 관찰하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를 준비해할 것입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아름답고 실용성있게 수리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최소한 서너명의 건축업자들을 불러서 리노베이션 견적을 뽑아서 비교하여 보면서 합당한 업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새교회당의 변화를 위해서 내부적으로 우리가 우선 결단하고 준비할 것은 교회 이름의 변경 여부입니다. 이미 안수집사회에서는 새 변화를 위해서 교회 이름의 변경을 추진하는 것으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제 안수집사회에서의 결정을 제직회와 그리고 사무총회에서 물어서 결정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이름의 변경을 추진하는 이유는 새환경을 통해서 새마음으로 도전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의 다짐인 것입니다.
새교회당의 변화 앞에서 우리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인도를 함께 잘 받아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입장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동체의 입장과 생각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환경적 변화가 순적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결정과 일에 빠지지 말고 함께 참여하여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한국의 목사이자 교수인 한 아버지가 어린 친딸의 시체를 집에 유기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핫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여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인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 및 신약학을 강의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딸을 구타하여 죽게 되자 그 시체를 집에 두고 있으면서도 버젓이 목회를 하고 교수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의 심리분석을 한 결과 자신이 어렵게 쌓은 스펙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40대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목사로서 교수로서 그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스펙을 쌓았을 것입니다. 그 스펙으로 원하는 대학의 교수의 자리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도 하는 목사로서 사회적으로 나름의 인생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스펙을 통해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아마도 절치부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펙을 통해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죄와 악도 철저하게 덮고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교수이면서 목사로서 자기 딸을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집에 두고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 분명히 그는 그의 입술로 설교를 하면서 기도하였을 것이고 성경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속인 것이고 사람을 속인 것이고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엄청난 일을 위해서 스스로 자수하지도 않았고 속이고 또 속인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힘들게 얻은 스펙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철저하게 속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그 동안 한국교회 안에 곪아 썩은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한 경우에 스펙을 우선 보고 담임목회자를 뽑고 교수를 세우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부분 스펙에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펙에 종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망가지고 심지어는 이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야망을 위한 사명 없는 스펙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철저하게 성품으로 지켜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성품은 마침내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은 스펙이 아니라 성품이 우선이 되어양 합니다. 스펙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스펙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학력과 경력의 스펙은 자리를 얻게 하지만 성품은 하나님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적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위하여 스펙을 쌓는 노력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시간이 가고 목사와 교수의 직분이 있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스펙을 쌓는 열정과 노력 이상으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거룩한 성품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과거에는 거짓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정직과 순결의 종이 되기를 날마다 힘써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정직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의 성품을 세워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임을 알고 힘써 그 모습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인생은 우선순위로 결정됩니다. 우선 순위대로 하루가 결정되고 일년이 결정되고 결국 인생이 결정됩니다. 지금 나의 우선순위는 나의 시간의 일과를 보면 압니다. 먼저 시간을 가장 많이 드리는 곳이 나의 우선순위입니다.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가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선 가치가 있는 것이 우선 순위가 됩니다. 돈에 가치가 있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에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지식을 소유하는 가치가 우선 순위이면 공부가 우선입니다. 가정을 우선순위로 삼으면 먼저 가정을 세우는 일에 투자할 것입니다. 가치를 따라 우리의 몸과 시간과 모든 것들이 투자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치는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여서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에 대해 어떤 관점일까요? 예수님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의 하나님 나라 다음은 통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1차적으로 예수님이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땅에 임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각자의 마음,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는 미래에 경험할 천국을 이미 여기에서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물론 그날에 비해 다소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지금의 천국은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신령한 하나님의 모든 복을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대개 그 하나님의 주시는 복들은 세상의 소유와 복을 초월한 인간의 노력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인도의 복들입니다.
예수님의 기준대로 우선순위의 삶을 살 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치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가치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이신 말씀을 가치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그 능력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그 생명의 말씀이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
신년이 되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우선순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시작은 무엇일까요? 나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매일 매일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높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서 우리가 받은 가정 일터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누가 진짜인가? 누가 가짜인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성령의 사역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속기가 쉽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에도 심각했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참된 사역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믿지 말고 분별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 거짓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200년 전에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거짓된 부흥, 거짓된 역사들을 통해서 마치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가 속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의 육신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날 때라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육체의 떨림이나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울거나 쓰러지거나 괴성을 지르는 현상들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종 성령 집회라고 하는 곳에서 집단적으로 소리를 크게 지르게 합니다. 그리고 뒤로 사람을 넘어뜨리게 하는 사역을 하기도 합니다. 괴성을 지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보이는 육체적인 현상들은 성령님이 아닌 사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영혼에 어떤 각성과 변화도 없다면 실로 거짓된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내면의 영혼 속에 각성을 주어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하고 평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하여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음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성경에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에 애굽의 마술사들도 몇가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마귀에 의한 역사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여서 믿는 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강조하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지선지자들을 경계하면서 마 7장 22절에서 그날에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는 초자연적적인 기사를 통해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잘못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 충족성을 무시하고 지금도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면 말씀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거짓된 성령운동을 통하여 헛된 부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편향된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성과 지성을 통하여 일어나는 깊은 깨달음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 그 결과 교회를 무조건 뜨겁게 가야 하고 큰 소리의 기도와 더불어 감정적인 느낌을 앞세우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받은 자기의 결론은 성경보다도 우위에 서게 됩니다. 그것으로 모든 잣대의 기준을 삼으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위 글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구상의 ‘새해’라고 하는 시의 일부의 내용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새로운 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 밖에서 일어나는 새 일을 기대하기 보다 먼저 내 안에서 내가 새로와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잠언서의 기자 솔로몬의 고백처럼 해 아래 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새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있었던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선 마음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문제는 마음이 더러워져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사람과 소통할 수 없고 관계가 어렵습니다.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높은 마음이 낮은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좁은 마음이 넓은 마음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닫힌 마음이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변화되지 않는 묵은 마음을 통해 마귀가 일하고 죄만 더해지게 됩니다.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듯이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 말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먼저 권위주의적인 자기 중심의 말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내 말은 정답은 아닙니다. 내 말은 항상 옳을 수 없습니다. 남을 조종하고 지시하고 통제하고 명령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다음 상대방을 무시하는 오만한 말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지식을 앞세운 오만함, 나이를 앞세운 거만함, 지위를 앞에 둔 방자함, 신앙을 앞세운 버릇없음의 말로 내가 주장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부를 알고 다 경험한 것 같은 교만한 자세로 남을 주장하려고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의 얼굴입니다. 거친 말은 거친 인격을 보여줍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인격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답게 말을 해야 합니다. 천국의 새언어는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입니다. 새사람다운 새말의 습관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행동이 새로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미지근함을 버리고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무책임을 버리고 성실한 책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포기하는 행동을 멈추고 인내하고 끈기있는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곳에 열매가 있고 행동하는 곳에 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속에 행동이 보여질 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되어 선도하게 됩니다.
새해에는 마음과 말과 행동이 새로와져서 나를 통하여 주변이 새로와지는 변화의 도구가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새해를 여는 기도
박춘수
새해에는 이렇게 살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주의 새로운 말씀을 보게 하소서
쌓인 욕심으로 닫힌 눈의
비늘이 떨어지게 하셔서
맑은 호수 같은 눈동자로
주님의 맑은 말씀들을
새롭게 보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막힌 귀를 열어
주의 깊은 말씀을 듣게 하소서
세상의 소리에 익숙한 귀의
세포가 딿아지게 하셔서
영롱한 새소리 같은 음성으로
주님의 정결한 말씀들을
기쁘게 듣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열어
주의 신비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세상 지혜로 채워진 마음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시어
가장 크고 신비한 하늘의 지혜로
주님의 깊은 말씀들을
귀하게 깨닫게 하소서
새해에는
우리의 게으른 몸을 깨워
주의 능력의 말씀을 행하게 하소서
죄로 잠자는 굳은 몸의
체질을 새롭게 힘을 주시어
가장 신속하고 힘있게 행하는 삶으로
주님의 권능의 제자가 되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1년을 묵상하면 어제 같았던 한 해였습니다. 한해 가운데 여기까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건,사고의 해를 당하지 않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자리를 지키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의 한 해를 묵상하면서 감사와 더불어 아쉬움이 교차 되어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첫째, 지난 1년 가운데 교회적으로 가장 감사할 것은 단기선교의 실천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격년마다 해외 단기선교를 실천하고 있는데 올해가 바로 그 해였습니다. 2 년 전에 갔던 헤이티에 다시 한번 단기 선교를 통해서 교회적으로는 선교의 현장 경험과 더불어 중장기적으로 교회의 선교 정책을 펴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선교에 대한 의식과 도전에 대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성도들이 선교현장의 도전과 체험을 통해서 교회가 선교의 지경을 넓혀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지속적인 말씀훈련과 제자훈련을 통한 내실을 다질 수 있는 한 해였던 것을 감사합니다. 특히 올해는 매주 설교의 핵심 성경 요절을 한절씩 암송하게 하여 1년 약 52개의 요절을 암송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감사한 것은 분기에 1회 요절암송대회를 한 결과 다수의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성경 요절을 암송하는 일에 참여하여 주었습니다. 어쩌면 수 십 년 평생 신앙생활을 한 가운데 외우지 못했던 성경 말씀을 올해 가장 많이 암송하는 한 해가 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젊은 층들이 영적 성숙의 도전과 경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20-30대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건강한 영성을 훈련 받을 때에 앞으로의 중년기 이후의 삶을 믿음으로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젊은 층들의 제자훈련 참여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젊은 층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건강한 영성을 세워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지난 한해 시간 가운데 아기들이 번식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교회의 젊은 가정들이 아기들을 출산하여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전도가 힘들고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아기들의 출생은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아기들이 없어 아기 웃음과 울음이 떠난 교회들은 분위기가 쓸쓸합니다. 그러나 아기들로 인해 그들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귀여운 행동은 교회에 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가 더욱 젊은 가정들을 통해서 번식의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2015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의 우선적인 과제는 새로운 교회당 장소의 무빙을 실천되기를 기대합니다. 그와 아울러 새로운 교회 역사의 전환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내적인 사역과 외적인 사역의 지경을 넓혀서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됩니다. 요즈음 낮의 온도는 마치 봄 날 같아서 심지어 벚꽃이 피고 개나리가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겨울같지 않는 12월이지만 어김없이 올해 크리스마스는 우리 앞에 왔습니다. 이미 거리의 집집마다 밤을 밝히고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츄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인사가 사라지고 전세계적인 성탄을 축하하는 분위기도 조심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우선 올해 미국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가 사라지고 대신에 ‘즐거운 휴일 (해피 할러데이’인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가 점점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그래서 오바마 미 대통령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는 연설에서 해피 할러데이‘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공공장소에 설치했던 성탄 축하하는 츄리나 장식을 이제는 점점 설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커피 전문업체인 스타벅스 에서는 해마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무뉘를 컵에 새겨 넣던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다른 종교의 명절도 있는데 유독히 기독교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화려한 장식과 들 뜬 인사로 맞이하는 것이 꼭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적으로는 전혀 믿음도 없으면서 외적으로 장식을 한다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을 했다고 우리의 신앙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기쁨 보다는 단순한 기념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을 갖지 못한 채로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예수님과 관련없는 헛된 장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내적 기쁨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의미있는 기쁨의 장식으로 잘 표현되어지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삶의 기쁨은 날마다의 삶이 메리 크리스마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최대의 주님을 기념하는 행위입니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도 내 삶이 주님을 나타내는 장식이 되고 내 삶이 주님을 기념하는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속박하였던 마귀에서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으면서 인도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면 그 어떤 크리스마스의 장식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015년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주안에서 나의 주님을 경험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