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오후에는 지방회 40주년 기념 예배를 지방회 교회 연합으로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 요소를 딛고 지방회 모든 교회들이 연합하여 감동의 기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었고 지방회 소속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였던 대로 모든 지방회 기념 예배 순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무리없이 잘 마무리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지방회 모든 교회들이 연합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이번 기념 행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예배의 찬양과 만찬 음식을 맡아 섬기면서 지방회 모교회로서 의미있는 섬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교단의 정체성에 대해서 지방회 소속 교회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소속된 미남침례교단은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면서 가장 성경적으로 보수적인 건전한 교단입니다. 남침례교단은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강조하고 무엇보다도 동성애와 같은 현대 시류를 거부하고 오직 말씀 중심 개교회중심 선교중심을 강조합니다. 특히 성경적인 민주주의 방식인 개교회주의를 통해서 교회가 어떤 조직과 제도와 같은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지향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중요한 결정 사항을 개교회의 가장 중심 모임인 사무총회를 통해서 결정하여 교회가 적용하게 하는 교회민주주의를 강조합니다. 미국의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건전하고 성경적인 교단으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40주년 지방회 행사를 갖으면서 교단 소속 다수의 교회들의 침체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목회자의 사명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점점 이 시대 교회가 소멸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지방회 교회들의 침체는 지난 몇 년 사이에 더욱 급격하게 심해졌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목회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징조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를 섬기는 우선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에 개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상황에서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욱 목회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목양일념으로 목회에 집중해야 할 때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 40주년을 돌아보면서 미래의 교회의 갈 길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살길은 다시 말씀과 기도를 회복하는 것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말씀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그 가운데 교제와 나눔과 선교와 같은 섬김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본질이 기본이 되는 교회가 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전의 시간보다 이후의 시간들이 더욱 교회가 힘든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영적인 소성 속에 건강하게 성장하는 우리 교회와 그리고 지방회 모든 교회들이 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본격적인 올해 아웃도어 시즌이 되어 우리 교회는 더욱 교회 가운데 교제의 장을 함께 갖기 위하여 스포츠그룹을 조직해서 그 기회를 갖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나누는 모든 교회 교제는 세상 사람들 교제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제의 모습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제의 질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 교제는 관계와 나눔 속에서 분명히 구별된 모습과 질의 특징이 나타나야 합니다. 과연 교회 가운데 가장 나타나는 교제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교회 교제는 예수님을 본받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교제하실 때에 먼저 자신을 낮추시고 섬기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항상 자신을 먼저 내려놓고 섬김으로 교제했습니다. 이렇게 먼저 섬김을 받기보다 남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교제함으로 세상과는 구별된 교제의 모습을 본보이셨습니다. 교회 교제는 내가 낮아져서 남을 높이는 섬김의 동기로 교제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교제할 때에 약자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교제는 돈과 지식과 권력이 있는 소위 강자들이 높임을 받고 행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교회에서 자신을 낮추고 종과 같이 남을 섬기면서 약한 자를 배려하는 교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교제는 먼저 내가 낮아져서 섬겨야 합니다.

교회 교제에서 우리는 합당한 명칭을 부르면서 교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조직이나 모임에서 사용하는 호칭이 아닌 서로를 부를 때에 형제님, 자매님, 집사님, 권사님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르는 호칭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의 혈연이나 학연이나 정을 앞세우는 교제이지만 교회는 주님을 앞세우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제에서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기분과 세상의 유행을 따르기보다 먼저 덕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항상 교회 교제는 상대방과 공동체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말을 하면서 교제할 때에 영적인 아름다운 관계가 맺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교제를 통해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나눔과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욕이 인도하는 만남과 교제는 상처와 싸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 중심의 만남이 되는 교제는 결국 파당을 낳고 교회공동체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교제하면서 운동하고 커피를 마시고 식사도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가깝고 친하더라도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즐거워하면서 모일 수 있지만 또한 헤어질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우리의 관계의 중심에 두고 먼저 섬기는 관계가 되어 교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말의 덕을 통해서 주님을 나타내고 모든 교제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신령한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에 교회의 불완전성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너무도 현실의 교회 가운데 예수님이 없는 것 같은 실망스러운 행동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시기 즈음에 읽었던 한권이 책이 한스 큉의 ‘왜 그리스도인 인가’ 이었습니다. 저자 한스 큉은 부패한 카톨릭교회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질문하면서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사랑과 정의와 선행을 앞세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나름의 정의와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보이는 행동만을 문제 삼았던 나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체성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오해하여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확신과 선량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단지 더 인간성이 좋고 더 착한 사람을 실현하는 것으로 삼고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예수님과 연결된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강조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그리스도인의 설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무엇인가? 이땅에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의 표지가 그리스도인의 표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전통, 율법,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 자기 인종, 당파나 교파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배척과 오해와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반대를 당하는 고난의 삶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고난 받을 수 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부활로 완성되고 영광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비판과 부정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주님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앞에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맞서면서 견디고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에 대한 뜻을 알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만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자입니다.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고 세상의 고난을 이기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간 제자훈련 시간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이 나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평상시 일상의 삶에서 집중했던 일이나 공부나 운동과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가장 의미있는 삶의 선택은 무엇일까? 인생의 의미있는 마지막 선택의 좋은 본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인생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선택했던 삶은 기도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앞에서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이 고난 앞에서 마지막 하시는 기도의 모습과 내용을 보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인생의 고난의 순간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 고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도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결국 죽음의 마지막 순간가운데 선택한 예수님의 기도는 고난을 감당하시고 영광의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기도할 때에 제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 시간에 육신의 피곤함으로 인해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육신의 피곤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것이지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쳐서 복종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위해서 깨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피곤함조차도 영혼을 깨어 기도해야 함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셨습니다. 다수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피곤한 육체의 지배를 받으면서 영혼을 깨어서 기도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곤한 육체의 상태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지 말고 육체를 쳐서 기도함으로 영혼을 깨워 기도하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 앞에서 미리 기도로 준비하심으로 마침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승리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영혼이 깨어서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먼저 우리의 영혼이 깨어서 하나님과 기도하는 자가 승리하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인생은 기도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인생의 순간조차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주간을 통해서 깨어서 기도함으로 다가올 인생의 순간들을 준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와 영광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몇 년동안 코로나시대를 거치면서 기존의 교회 패러다임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온라인 예배입니다. 현장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는 교회 예배의 대안이었습니다. 과연 온라인 예배를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제대로 답을 내리기에 앞서 긴박한 상황이었던 당시의 모든 교회들은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예배 현장에 참석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가정에서 컴퓨터나 셀폰 화면을 통해 드렸던 대면 예배의 시간은 기독교 역사에서 어쩌면 전무 후무할 수 있는 예배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가 지나고 모든 것이 회복된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를 과연 드려야 하는가 교회들마다 고민이 생겼습니다.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코로나시대 때에도 드렸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코로나시대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가능하지만 대면 예배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대부분 모든 교회들이 온라인예배와 대면 예배를 병행하면서 관망하는 입장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수요일과 주일과 같은 경우에 대면과 온라인예배를 병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온라인 예배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고민이 됩니다.

분명히 예배란 하나님과 인격적, 영적 만남의 시간입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적으로 함께 만나서 함께 몸과 마음을 연합하여 드리는 교회 예배는 대면 예배로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장래에 천국에서 함께 드릴 예배를 미리 맛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헌하고 함께 말씀을 경험하면서 한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님을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는 함께 드리는 예배공동체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특별한 필요의 상황에서 드렸던 온라인 예배의 은혜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때의 모든 특별한 상황에서 일상의 삶이 다시 돌아왔듯이 우리의 예배도 대면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감동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봄이 되어 만물이 다시 새롭게 약동함으로 싹이 피고 꽃을 내는 이 시기에 우리도 더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감동의 예배를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한번은 후배 목사가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목사님들의 일반적인 대답은 아마도 “설교”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매주일 여러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많은 고난의 대가를 치룰 정도로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또 어떤 목사님들은 “리더쉽”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교회 일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목회자에게 제일 힘든 것은 설교도 리더쉽도 아닌 자기관리라고 생각합니다. 매일같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관리하는 것은 항상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 적용되기 때문에 제일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성경의 사도 바울은 자기관리가 철저했습니다. 그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저하게 자기 관리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내가 사나 죽으라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삶의 이유가 주를 위한 목적이 분명할 때에 바울의 삶은 인간적인 욕심에 지배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야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삶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시간을 아낌없이 헌신했습니다. 물론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바울 같은 몰입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자기 관리를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내 삶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전하게 자기 관리가 온전하게 지속하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 부인과 복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을 지켜낼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가장 문제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변화의 지름길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위하여 마음을 위한 시간을 우리는 투자하여야 합니다. 매일 매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먼저 갖아야 합니다. 시간을 먼저 구별하여 마음의 돌봄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전하게 자기 관리를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관리가 잘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님의 풍성한 인격의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덕과 영광을 나타나게 됩니다. 둘째는 자기관리가 잘 된 사람은 주의 교회와 주의 나라를 세워가는 선한 능력의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자기 관리가 잘 된 그리스도인은 주의 몸 된 교회를 귀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며 가정과 일터에서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의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관리가 잘 된 사람은 성품의 능력과 더불어 삶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결과 관계도 승리할 뿐 아니라 주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도 잘 감당합니다.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자기 관리를 통하여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 제자 훈련의 우선적인 훈련이 묵상 훈련입니다. 감사한 것은 묵상훈련을 통해서 묵상의 힘을 누리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묵상의 힘을 실감합니다. 묵상 이전과 이후의 삶은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인생을 살지만 다른 삶의 질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묵상은 인생 밑바닥에 숨어있던 삶의 열정을 끌어올려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지하는 힘이 됩니다. 매일 묵상을 통해서 매일 새 힘을 공급받는 묵상의 사람들은 매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삶을 살게 합니다. 묵상은 신비한 힘을 갖게 하고 신비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묵상의 힘은 마음의 힘을 갖게 합니다. 대부분 인생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허다한 지식과 여러 상처로 쪼개어진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단단한 근육으로 새롭게 하는 힘은 묵상입니다. 특히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기피하고 부정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마음을 회복하는 길은 묵상이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인생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으로 방황하기도 합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바로 잡아서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인도하는 길은 묵상이 답입니다. 바르고 온전한 묵상은 잘 익은 과일처럼 잘 익은 마음으로 단단하고 성숙되게 무르익게 합니다.

묵상의 힘은 비전의 힘을 갖게 합니다. 매일 묵상을 하는 것은 매일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새 길이 보이고 새 길이 만들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꿈을 잃는 이유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갇히는 사람은 꿈이 없지만 묵상으로 하나님 안에 갇히게 되는 사람은 비전을 품게 됩니다. 감옥 같은 환경에 있어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비전의 삶으로 즐겁고 행복합니다. 묵상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살맛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인생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묵상의 힘은 삶의 힘을 갖게 합니다. 묵상의 힘으로 삶의 현장에 나간 사람의 입술은 승리합니다. 묵상의 힘으로 관계하는 사람은 화평과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묵상의 힘이 있는 가정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천국을 경험합니다. 묵상과 함께 공부하는 사람은 지식을 지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묵상하는 사람에게 모든 삶에서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삶의 힘으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묵상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삶의 형통과 승리가 있습니다. 묵상이 없는 삶은 하나님 없는 삶이지만 묵상이 있는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경험합니다.

매일 묵상은 매일 하나님의 힘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묵상의 힘으로 마음의 힘, 비전의 힘, 삶의 힘을 누리는 형통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느덧 나이가 60세를 넘고 목회를 시작한지도 35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시작할 때가 청년 때였던 28살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너무도 빨리 흘러갔습니다. 젊은 시절 인생과 목회의 현장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이 균형잡힌 삶을 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젊은 30대 시절 너무 목회에 빠져서 가정 가운데 아빠의 역할을 소홀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또 성경에 너무 집중하느라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후반기가 되면서 가장 집중하는 것은 발란스있는 인생과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움이 있지만 균형잡힌 삶을 위해서 날마다 주님 안에서 그 발란스를 이룰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님의 균형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알기를 힘쓰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성경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적용하는 삶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것과 더불어 성령님과 함께 기도하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영혼을 살 수 있습니다.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로 기도하는 삶을 삽니다. 성경과 성령님의 균형을 이루는 영성의 사람은 결국 그 성품을 통해서 성령의 풍성한 열매가 나타나는 복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의 균형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가정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영성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영적 가족공동체인 교회를 이루는 영성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일터 가운데 영성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다. 이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갖고 모든 삶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히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발란스를 잃어버리고 가정의 아이들이 우상이 되거나 교회 사역이 우상이 되거나 일터의 일이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균형잡힌 영성의 사람은 주님이 주인으로서 가정과 교회와 일터 속에서 주님의 다스림 속에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일과 쉼과 누림의 균형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본래 일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복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일은 수고와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일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수고 속에서 열매의 대가를 누립니다. 그리고 쉼을 통해서 우리는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욱 소망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 받기도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연만물을 누림을 통해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하늘과 새 땅을 누릴 것을 더욱 누리는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는 우리는 나의 욕심을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의 리더십의 문제를 보면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결국 준결승에서 졸전을 벌이면서 4강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좋은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팀웍을 묶는 감독의 리더십이 많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번 한국 축가 국가대표팀 감독의 우선적인 실수는 팀웍을 깨는 선수들의 문제를 보면서도 그냥 방조했고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팀의 경기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더는 분명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보통 리더가 실수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종종 리더는 리더십의 현장에서 문제를 만나지만 두려움으로 인해서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고 숨기고 회피할 수 있습니다. 리더의 입장에서 문제를 잘못 다루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리더의 입장에서는 문제를 수면 위에 내놓기가 두렵습니다. 그 문제를 내놓는 순간 여러 가지 비판을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리더십에 먹칠을 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더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가 있을 때에 용기 있게 직면해야 합니다. 리더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용기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리더는 실수를 인정하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리더의 실수는 개인을 넘어서 팀의 패배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번에 한국 축구의 실패는 명백한 감독의 전술의 부재의 결과였다고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감독은 전혀 그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대었습니다. 만일에 이번에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할 지에 대한 비젼있는 대안을 제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리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족을 깨닫고 더욱 온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도전하는 리더를 사람들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리더는 실수를 통해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제일 힘든 것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실수를 인정하면 자신의 마음을 자유하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스스로의 능력과 경험을 앞세웠던 교만을 깨뜨리는 연단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성경에서 역사에서 수많은 리더들이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더 온전한 리더로 세워져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서 배우기 위해서는 실수로 인한 명백한 쓴 맛의 대가를 철저하게 책임지고 경험하는 기회를 담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리더를 하면 할수록 결코 실수를 피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통해서 실수를 줄이고 받은 리더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선한영향을 미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일본인 사이토 다카시가 쓴 ‘60대를 위한 논어’를 보면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했다. 마흔살이 되어서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 예순 살에 남이 하는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좇아도 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어른의 나이 60살 정도가 되었을 때에 어른의 위치가 되었을 때에 가장 중요한 자세가 ‘듣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듣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면서 먼저 잘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안타까와하면서 먼저 잘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나이가 들을수록 제일 힘든 것이 듣는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어지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는 것이 마음에서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세어서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어서 남의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생 60세 정도를 살다보면 웬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나이가 60세 정도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신앙에 대한 왠만한 지식과 경험은 다 있는 편일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도 힘들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어른들을 향해서 ‘꼰대’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실 이 말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아버지나 어른들에 대해서 속어로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과거 한국 사회는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던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만 가르치려고 하는 어른들이 오히려 비난을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세대는 존경받는 어른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먼저 이런 문제 앞에서 우리 기성세대는 충분한 자기 반성이 필요합니다. 지금 어른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다음 세대들의 의견과 생각을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힘든 삶 중에 하나가 어른이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른의 특징은 자기 중심이 아닌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덕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충고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 그리고 대접받으려고 하는 자세를 내려놓고 먼저 낮아져서 남의 소리를 듣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을 종의 자리에 두고 먼저 남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고난 속에서도 자기 몸을 섬김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 후반기를 향해 점점 살아가면서 마음을 열고 더욱 듣기를 적용하면서 마음의 그릇을 더욱 키우는 멋있는 어른의 삶을 꿈꾸면서 도전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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